얼마 전부터 미국에서는 양성 평등이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논의가 활발하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로 유명한 배우 엠마 왓슨이 지난해 UN여성기구(UN Women)의 친선대사를 맡아, UN에서 양성 평등에 대한 감동적인 연설을 펼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여우조연상을 받은 패트리샤 아퀘이트가 수상 소감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외쳤다. 최근 한국에서도 성차별과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남녀 평등지수는 OECD 28개국 가운데에서 28위를 기록했고, 한국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이슬람권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적으로도 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과학계에서 여성의 위치는 어떨까? 예를 들어 과학자나 엔지니어라고 하면 우리는 아직도 자신도 모르게 남성을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2014년 완구업체 레고에서는 ‘연구소(Reseach Institute)’라는 이름으로 여성 과학자를 주제로 한 시리즈를 출시했다. 고생물학자, 천문학자, 화학자인 여성 과학자들이 등장한 이 시리즈는 발매된 지 며칠 만에 품절되는 인기를 누렸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인기를 통해, 이제껏 과학 기술 분야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남성과 같지 않았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여성 과학자이며 엔지니어인 이디스 클라크(Edith Clarke, 1883~1959)의 이름을 기억할 만하다. 여성 과학자들이 남성 과학자들의 보조 역할에 머물러야 했던 시기, 그녀는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연구를 이어갔다. 그리고 GE는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이디스 클라크(Edith Clarke, 1883~1959)
이디스 클라크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녀가 장차 토마스 에디슨이나 니콜라 테슬라, 라이트 형제, 알렉산더 그레이험 벨처럼 유명한 발명가의 대열에 끼게 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883년 태어난 이디스 클라크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외곽의 엘리코트 시티(Ellicott City) 근처 농장에서 자랐다. 생계로 바쁜 집안에는 그녀 말고도 8명의 아이가 더 있었다. 어렸을 때 이디스는 오늘날이었다면 ‘학습장애’라고 진단받았을 법한 아이였다. 읽기와 철자법 과목의 성적이 나빴던 것이다. 하지만 수학이나 카드 게임에는 재능이 있었는데, 특히 듀플리케이트 휘스트(Duplicate Whist)라는 카드 게임을 잘했다고 한다.

이디스 클라크가 자란 메릴랜드주 엘리코트 시티의 작은 집. 벽돌로 된 마구간이 보인다.
(사진 제공: 미국 의회도서관, E.H. 피커링)
이디스 클라크가 살았던 때는 컴퓨터 이전의 시대였다. 당시 과학 교육을 받은 소수의 여성들은 남성 동료들의 작업을 도와 “인간 컴퓨터”처럼 일하면서 노동집약적인 수학 문제의 해결을 돕곤 했다. 하지만 여성 최초로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전기공학 학위를 받은 클라크는 이런 현실에 맞서고자 했다. “저는 항상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엔 여성들은 엔지니어링을 공부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만연했죠.” 나중에 <댈러스모닝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디스 클라크의 어린 시절은 비극적이었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열두 살 때 어머니마저 잃었다. 법정 후견인이던 삼촌은 이디스를 메릴랜드의 기숙학교에 보냈다. 클라크는 열여덟 살 때 부모님의 유산 일부를 받아 뉴욕주 포킵시(Poughkeepsie)에 있는 바사르 대학교(Vassar College)의 수업료를 냈다. 바네사 대학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한 클라크는 졸업 후 AT&T에 입사해서 “컴퓨터”의 역할을 했다.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전화선 구축 사업에 관여했지만 제대로 된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던 이디스는, 1918년 MIT 대학원에 전기공학 전공으로 입학하게 된다.
1919년 대학원을 졸업한 이디스 클라크는 스케넥터디(Schenectady)에 위치한 GE에 입사하였다. 미국에서 전기가 전국적으로 빠르게 전파되던 당시, 그녀는 250마일 거리의 복잡한 원거리 송전을 해결하는 “그래픽 계산기” 관련 기술로 자신의 첫 번째 특허를 신청했다. 스케넥터디 과학박물관에서 GE의 역사를 연구하는 크리스 헌터(Chris Hunter) 큐레이터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디스 클라크는 찰스 스타인메츠(Charles Steinmetz)의 교류 이론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확장시킨 엔지니어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MIT 석사 학위를 취득했어도 그녀는 고속 터빈 로터(High-speed Turbine Rotors)의 기계 응력을 계산하는 ‘여성 컴퓨터’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21년 직장을 그만두고 이집트와 이스탄불을 여행한 그녀는, 이스탄불 여자대학교에서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송전 문제를 해결하는 이디스 클라크의 그래픽 계산기. (이미지 제공: NIHF)
1922년 이디스 클라크는 GE에 정규 엔지니어로 재입사하였다. 미국 발명가 명예의전당(NIHF)에서 발행한 전기에 따르면 그녀는 미국 여성 중 최초로 전기 엔지니어로서 정식 고용된 인물이었다. 그녀는 또한 미국 전기엔지니어협회(American Institute of Electrical Engineers, AIEE, 현 IEEE)에 가입하여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논문을 발표했고, 이후 여성 최초로 온전한 투표권도 행사했다. 클라크의 논문 “등가회로 혹은 원선도에 의한 송전 시스템-연산의 정상안정도(Steady-state stability in transmission systems-calculation by means of equivalent circuits or circle diagrams)”는 발표 당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클라크는 그 후 25년 동안 GE에서 근무하면서 송전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녀가 연구한 주제는 이후 산업계의 생명선 역할을 했다. 이디스는 300 마일 이상의 송전선을 수학적으로 검토 연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또한 전력 네트워크에서 데이터를 획득할 수 있는 분석기 사용법도 연구했는데, 이는 오늘날 스마트 그리드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는 연구였다.
1945년 이디스 클라크는 GE에서 퇴직했다. 그 후 오스틴의 텍사스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다 1959년11월 볼티모어에서 생을 마쳤다. 2015년, 클라크가 세상을 떠난 지 50여 년이 지난 후 그녀의 삶이 다시 조명을 받게 되었다. 500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헌정된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 NIHF)에 오른 것이다.
제임스 E. 브리튼(James E. Brittain)은 평생 GE와 학계를 오가며 활동했던 이디스 클라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는 전력 시스템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하던 때라, (컴퓨터 같은) 전기-기계 방식 장치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동안 엔지니어들이 심오한 수학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던 일을 그래프와 단순한 형태로 변환하여 처리한 것이 그녀의 업적이죠.”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오른 GE 출신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22명으로 에디슨, 테슬라, 노벨상 수상자 어빙 랭뮤어, 최초로 풍력발전용 터빈을 발명한 찰스 브러시, X선 기계의 혁명을 가져온 윌리엄 쿨리지, LED 기술을 선도한 로버트 홀과 닉 홀로니악 등이다. 이들 중 여성은 이디스 클라크와 물리학자 캐서린 블로지트(Katherine Blodgett), 두 사람이다.
앞선 세대의 여성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남성들과 동등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과 경쟁하며 연구 활동을 펼쳐야 했다. 오늘날, 연구를 비롯한 여러 활동에서 여성들이 남성들과 평등한 상황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이제 사회나 기업의 당연한 의무가 되었다. GE가 현재처럼 여성 임직원들의 연구와 업무 경력을 꾸준히 지원하는 기업으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이디스 클라크나 캐서린 블로지트 같은 여성들의 활약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캐서린 블로지트는 여성 최초로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GE에서 분자 코팅을 연구했고,
빛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투명한 “불가시(不可視) 유리”를 개발했다(사진 제공: 스케넥터디 혁신과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