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여러 매체의 문화란에 ‘900년 만의 귀국’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여럿 실렸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져 일본 교토에 있던 나전경함(螺鈿經函)을 한국 국립중앙박물관회에서 구입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소식이었다. 사진으로 나전경함을 본 많은 사람들이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하지만 이번 뉴스로 나전경함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한 이도 드물지 않을 듯하다. 나전경함은 이름 그대로 나전칠기 기법으로 장식한 상자이며, 불경을 넣어두는 용도로 쓰였다.

국립박물관이 2014년 7월 언론에 공개한 고려 시대 나전 경함의 모습. 높이 22.6cm,
폭 41.9×20.0cm, 무게 2.53kg의 장방형 상자에 모란당초 무늬가 전체를 둘러싸고
대마 잎 무늬•거북 등껍질 무늬•구슬 무늬 등으로 주변을 장식했다.
나전칠기를 낯설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나전(螺鈿)이란 조개나 전복, 소라의 껍질을 붙여 장식하는 기법이고, 칠기(漆器)는 옻칠로 만든 제품을 의미한다. 고급스러워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나전칠기는 1960~70년대 이후 대중적 인기를 잃고 쇠퇴해가는 전통 공예가 되버리고 말았다. 조금 나이가 든 세대라면 집안에 있던 커다란 검은 장롱이나 화장대, 문갑 등에 장식된 화려한 자개를 떠올릴 것이다. 검고 반짝이는 바탕에 무지개 빛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자개 장식은 현대 감각으로 볼 때 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화려한 나전칠기는 대부분 일제시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양식을 따른 결과다. 조선 시대 이전의 나전칠기는 바탕의 빛깔이며 자개로 놓은 무늬가 단아하고 섬세하며 차분하다. 나전 칠기라고 하면 특유의 머리 아픈 냄새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의 칠기는 천연 옻칠이 아닌 화학 옻칠을 사용한 것도 많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경험했던 옻칠은 아마 십중팔구 화학 제품을 이용한 칠이었을 것이다. 천연 옻칠의 향은 그렇게 자극적이거나 불쾌하지 않다.

조선 시대의 나전 칠기 상자. 39.0x 65.0x 14.5. 17-18세기.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일본 중요문화재.
오늘날엔 비록 나전칠기가 힘을 잃었지만, 한국 나전칠기는 동아시아에서 매우 높은 평판을 받던 공예다. 나전과 옻칠 기법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고루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옛 한국의 나전칠기, 특히 고려 시대의 그것은 다른 나라 공예가 따라가기 힘들 만큼 정밀하면서도 아름답다. 서로 다른 공예 기법인 자개와 옻칠이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를 빛내면서 잘 어우러져 있다.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온 고려 나전경함은 세계에 단 8점밖에 남지 않은 것 중 하나다. 부끄럽게도 이 8점은 모두 외국에 소재하는데, 애초 경함 자체가 해외 수출(?)을 위한 작품이기도 했다. 1272년 고려 원종 때, 원나라 황후가 대장경을 넣어두기 위해 나전경함을 요구했고, 고려는 함을 만드는 기관인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만들어 완성된 경함을 원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융성하던 나전칠기 기법은 현대에 와서 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일까? 여러 장인들이 전통 공예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 작품들이 많은 사람을 만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는 단순할지도 모른다. 옻나무에서 옻칠 원액을 만드는 과정이 매우 힘들고 경제성이 떨어지며, 옻칠을 하고 자개를 붙여 꾸미는 과정이 너무 고단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토록 어렵게 완성한 작품(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는)에 대한 수요는 너무나 낮다. 질이 나쁜 화학 옻칠 제품이 시중에 많이 팔린 이유 역시 경제성 때문이었다.

허은경 Cell B-2, 2012 80 X 120 (cm) mother of pearl,
Korean traditional lacquer on wood board
아티스트인 허은경 작가는 현대 미술 작가이면서도 가장 전통적인 나전 칠기 기법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먼저 바탕에 천을 붙이고 거기에 옻칠을 한 후 말리고, 표면을 갈아낸 후 다시 칠하고 말리는 방식이다. 옻칠은 온도 20~25도, 습도 70~80%의 조건에서만 건조된다. 그 조건을 잘 맞춘다 해서 항상 제대로 건조되는 것이 아니라 변수도 많이 발생한다. 천연 재료이니만큼 까다로운 성미를 지닌 것이다. 더구나 옻칠은 한번 칠해서 말리고 일일이 표면을 갈아서 광택을 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나전칠기 제품의 표면을 만져보면 매끄럽고 평탄하다. 옻칠을 여러 번 거듭해, 표면에 붙인 나전의 두께만큼 쌓아서 올렸기 때문이다. 대신 그 표면의 완성도와 광택은 다른 어떤 기법으로 따를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강하다. 옻칠 기법으로 완성된 작품의 수명을 흔히 천년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허은경, Cell 4 , 2013, 80 X 120 (cm), mother of pearl,
Korean traditional lacquer on wood board

Cell 4 , 2013, 80 X 120 (cm), mother of pearl,
Korean traditional lacquer on wood board
허은경 작가의 특징은 가장 전통적인 기법을 쓰면서도, 가장 현대적이고 개념적인 작품을 생산한다는 데에 있다. 그의 <Cell> 시리즈는 세포의 기형적인 분열을 표현하며, <Micro, Macro> 시리즈는 가장 작은 것에 깃들어 있는 우주적인 것/우주에 깃들어 있는 가장 미소(微小)한 것을 표현한다. 현실 vs 과학, 현실 vs 판타지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희미해지도록 만든 이 작품들은, 그 인위적인 경계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내면의 깊이와 문제의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눈으로 보이는 작품들의 형태와 색상은 아름답다. 손으로 만져 보면 단단하고 매끄러운 옻칠의 감촉이 느껴진다. 오감과 이성 그리고 상상력이 동시에 작용하기를 요구하는, 어찌 보면 관객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허은경, Mapping , 2009 118 X 107 X 45 (cm)
Korean traditional lacquer, cloth wire frame
허은경 작가가 선택한 나전칠기 기법은, 사진 기술로 표현하기 가장 까다로운 전통 공예 기법이기도 하다. 옻칠은 사람의 손으로 문질러 광택을 만든다. 그냥 보았을 때 보석처럼 반짝이지는 않지만 카메라의 눈으로 볼 때엔 빛을 흡수하는 동시에 독특하게 반사하여, 표면의 광택이 사진에 잘 표현되지 않는다. 자개 역시 무지개 색깔로 빛을 난반사하기 때문에 사진에는 항상 뭔가 모자란 듯한 평면적 색채로 구현된다. 나전칠기란 예술의 다른 소재들처럼 빛을 이용해서 빛나기 보다는, 스스로 빛을 품어 만드는 공예일지도 모른다.
천 년도 더 전에 완성된 기술인 나전칠기 공예가 현대의 아티스트의 손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나고 있다. 전통 공예 장인들은 특유의 고집을 가지고 옛 기술을 이어가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예술가들은 그 기술로 다른 지평을 만들고 새로운 경계를 넘어선다. 똑같이 오랜 기법에서 출발하였으나 다른 생각과 상상력을 가졌기에 가능해진 결과다. 그런 관점에서 허은경 작가의 작품을 보면, GE라는 기업을 생각하게 된다.
19세기 에디슨의 전구에서 시작된 GE는 아직도 전구를 만들고 있다. 어딘가에서는 에디슨이 발명했던 최초의 전구를 그대로 재현한 제품을 아트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 GE는 100년의 세월 동안 끝없이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LED 조명 기술을 최초로 발명하여, 라이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산업인터넷 기술을 적용하는 등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을 현실화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단순히 과거의 기술을 계승발전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평을 열고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고려 시대의 나전칠기 경함은 21세기에도 남아 있다. 그리고 여전히 아름답다. 박물관에서 천 년의 시간을 만나는 일 역시 유익하고 흥미롭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순간, 이곳에 살아 있다. 과거의 빛이 아닌 오늘의 빛, 미래로 이어지는 빛을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다. 과거에 발을 딛고 서서 남다른 미래를 꿈꿔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