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바야흐로 1,000일밖에 남지 않았다. 세계인들에게 도시의 이름마저 생소하게 느껴졌던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것은 지난 2011년 7월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123차 IOC총회에서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기까지 평창은 2번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평창에서 올림픽이 열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은 이미 올림픽과 깊은 인연이 있는 나라이다.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간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올림픽이 있었다. 전세계에서 159개국 1만 3,304명의 선수단(선수 8,391명)이 참가하여 올림픽 사상 최대 대회규모를 기록했던 88올림픽은 ‘화합과 전진’을 기본이념으로, ‘최다의 참가, 최상의 화합, 최고의 성과, 최적의 안전, 최대의 절약’을 대회목표로 했다. 한국은 1979년 9월에 제24회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기로 결의하고 1981년 2월에 IOC본부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정식 제출했다. 같은 해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 대 27로 누르고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되었다. 아시아에서는 2번째, 그리고 세계에서는 16번째로 올림픽 경기대회 개최국이 된 것이다.

1988서울하계올림픽 개막식 (사진출처: 국가기록원)
특히 88 서울올림픽은 올림픽 역사에서도 의미 깊은 행사였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권 국가들의 참가 거부로, 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반쪽짜리 올림픽이 됐던 데 반해 서울올림픽은 12년 만에 동서가 모두 참가한 화합의 행사였다. 동서양 진영 선수단이 모두 참가하여 동서의 이념분쟁•인종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개폐회식 행사 역시 이런 화합과 평화를 주제로 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은 분단 국가다. 개폐회식은 그 분단의 아픈 상처에서 시작해 그 상처를 극복하고 장벽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새싹이 돋는다는 의미를 형상화했다. 개폐회식의 기본 주제인 ‘벽을 넘어서’는 행사에 참여한 수많은 관중과, TV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1988서울하계올림픽 폐막식 (사진출처: 국가기록원)
88서울올림픽은 인류의 화합과 전진을 가로막는 장벽인 인종의 벽, 이념의 벽, 경제적 격차의 벽을 넘는 올림픽의 비전을 보여주었다. 두 번이나 동서 진영간 이념의 장벽에 부딪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던 올림픽이 서울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가 되어, 이념 갈등과 분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이 인류 화해의 마당으로 바뀌었다. 또한 한국의 뿌리 깊은 문화와 전통, 한국인의 저력 등이 올림픽을 계기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고, 이로 인해 세계 속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지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한국이 주권 국가로서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것은 1948년 제14회 런던대회였다. 당시 68명으로 구성된 한국 선수단은 7개 종목에 출전 복싱에서 한수안 선수, 역도에서 김성집 선수가 각각 동메달을 획득하여 메달 순위 24위를 차지 하였다. 더 오래 전, 손기정 선수와 남승용 선수가 1936년의 베를린대회에서 마라톤에 출전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였으나, 주권을 빼앗긴 상태였기에 출신국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을 삼켜야 했던 과거도 있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이후 우리나라는 1980년 모스크바대회를 제외하고 올림픽에 모두 참가했고,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는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가 건국 후 처음으로 금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1984 LA올림픽에서는 140개국 7,80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종합순위 10위라는 큰 성과를 거둠으로써 차기 올림픽 개최국으로서의 면모를 세계에 과시하였다.
이런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평창이 올림픽 유치를 준비한 것은 2003년부터였다. 2003년에는 현지 실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3개의 도시가 경합한 IOC총회 1차 투표에서 2등과 11표 차이로 앞서 나가며 의외의 선전을 보여주었으나 2차 투표에서 3표차로 평창을 앞선 벤쿠버가 2010년 올림픽의 개최지로 선정된 바 있다. 이후 2014동계올림픽 유치전에서도 2007년 현지 실사 평가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아 1차 투표에서는 소치보다 앞섰지만 2차 투표에서 다시 역전당하고 말았다. 이 실패의 기록에 대한 철저한 학습과 분석을 토대로 세 번째 도전이 진행되었다. 때마침 2010년 벤쿠버동계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국가대표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올림픽 유치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더욱 커졌고, 결국 더반 IOC 총회에서 95표 중 63표를 얻어 전폭적인 지지로 2018평창동계올림픽대회의 유치를 확정하게 되었다.

2014소치동계올림픽 폐막식
고산지대가 많은 평창 특히 대관령은 0℃ 이하의 일수가 무려 110일이나 될 뿐만 아니라 연 평균 250cm의 적설량을 보여준다. 1974년 평창 대관령에 문을 연 용평리조트는 뛰어난 입지 조건으로 한국 최초의 스키 리조트가 되었으며, 평창 동계올림픽대회의 알파인 스키 경기가 펼쳐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스키 관광 분야의 유수한 업체를 선정해 시상하는 “월드 스키 어워즈”에서 2013년, 2014년 연속으로 “베스트 스키리조트” 상을 수상한 바 있다.
빙상 경기가 함께 열리는 강릉은 수려한 산과 푸른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도시로 해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편 2011년 2월 IOC 총회를 앞둔 현지실사 방문 평가에는 시설 설계가 높은 점수를 얻었다. 선수들이 경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해 경기장의 80%를 선수촌과 10분 거리에 위치하도록 배려하였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짜임새 있는 시설 조감도는 2011년 IOC 총회 투표 당시 평창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뮌헨을 물리치는 강력한 장치가 되기도 했다. 평창의 경기장 80%는 도보 30분 차량으로 1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도록 시설을 설계했다.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 (사진: 2018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제공)
특히 2004년부터 유치가 확정되던 2011년까지 강원도민과 평창 유치위원회의 노력으로 진행해온 8년간의 드림프로그램은 평창 올림픽 개최의 근간이 되었다. 드림프로그램은 동계스포츠가 낯선 전 세계 여러 국가의 청소년들을 초청해 동계스포츠 선수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프로그램이다. 2004년부터 시작된 드림프로그램으로 벌써 1,500여 명의 청소년들이 평창과 강원도를 다녀갔고, 그 중 인도의 만걀 스탄진, 몰도바의 브라이 일리애를 비롯한 46명의 참가자가 자국 국가대표로 동계유소년올림픽, 동계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의 꿈을 실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Olympic Movement”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드림프로그램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과정에서 평창의 진정성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IOC에서도 소중한 올림픽 유산으로 평가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을 정도이다.
서울에서도, 평창에서도, 한국은 올림픽을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꿈과 비전을 가지고 그것이 현실이 되게 하기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많은 사람들이 단결해서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노력한다. 88 서울올림픽에서 화합과 평화라는 가치가 고양되었다고 한다면, 평창은 준비 기간부터 “꿈”의 실현을 내세우고 있다. 문화와 환경이라는 비전이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펼쳐질지를 기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