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우주를 다룬 <그래비티>나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가 한국에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우주와 인간의 존재론, 인간의 관계나 시간성 같은 주제를 다룬 영화들은 사실 오래 전부터 만들어졌다. SF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오래된 영화이긴 하지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아서 클라크의 소설 원작)를 한번쯤 봤을 법하다. 우주 경쟁이 한창이던 1968년에 상상했던 2001년이라는 미래의 모습은 지금 보아도 꽤 흥미롭다. 그 당시에 이미 요즘 영화에서 다루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갈등, 우주 여행과 시간성의 문제 등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스틸 사진. ©Metro-Goldwyn-Mayer (MGM) Stanley Kubrick Productions
관객 입장에서는 이런 작품들을 볼 때 시각적인 볼거리에도 또한 주목하게 된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 영화에 대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하디 에이미스(Hardy Aimes)가 디자인한 의상들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그렇게 촌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우주선이나 우주 정거장들이 패션에 종속되기보다는 엔지니어들의 기술적 상상력에 바탕을 더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쉽게 낡을 수가 없지요.”
듀나의 말처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우주선 등의 디자인은 오늘날의 관객들이 보아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반면, 미래로 그려지는 시점의 옷들은 오히려 복고적인 느낌이 든다. 영국 왕실 디자이너로 유명한 하디 에이미스의 의상은 당시로선 미래를 보여주는 혁신적인 디자인이었고, 이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패션계에서 ‘스페이스 룩’이라는 트렌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관객이 보기에 이런 패션은 ‘억지로 만들어낸 미래’ 같은 느낌이 든다. 그건 아마 듀나가 지적했던 바 “패션에 종속”된 디자인과 “엔지니어들의 기술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디자인의 차이일 것이다.
루이스 헨리 설리번(Louis Henry Sullivan)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말은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익숙하다. 산업 디자인과 기능주의에서 비롯되기는 했으나, 이 말은 디자인이란 것이 단순히 “아름다움” “심미성”의 문제가 아니라 쓰임새 즉 기능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되새기게끔 해준다.
지난 9월의 뉴욕 패션 위크를 주의 깊게 관찰한 사람들이라면, 설리번의 고전적인 명제를 새삼스럽게 떠올릴 것 같다. 이번 패션위크에서 많은 디자이너들이 3D 프린팅, 방수 소재, 단백질 구조, 파쇄기 등의 과학 기술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을 앞다투어 발표했기 때문이다. 전세계의 패션지를 장식한 디자이너들의 이런 작품과 GE의 기술력이 얼마나 닮았는지 한번 살펴보자.
펠리페 올리베이라 밥티스타(Felipe Oliveira Baptista)가 디자인한 라코스테의 봄 컬렉션에서는 바다에서 영감을 얻은 방수 소재가 등장했다. 천연 섬유와 합성 섬유를 PVC와 고무 같은 폴리머로 코팅한 이 소재는 통기성 역시 고려하고 있다.
이런 소재는 일상복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GE의 경우에는 단순히 눈과 비를 막는 데에 그쳐서는 충분하지 않기에 한층 더 나아간 방수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항공기의 날개나 터빈 블레이드를 위해 초소수성 표면(superhydrophobic surfaces)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기술은 일상 생활의 눈보라나 비바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기압 및 기후의 변화를 이겨내야 하는 기계들의 표면을 보호해준다.
2014 뉴욕 패션위크에서 전위적이고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특히 화제를 모은 브랜드 크로맷(Chromat)의 디자이너 베카 맥카렌(Becca McCharen)은 로봇공학, 3D 프린팅 같은 과학 기술에 영감을 얻어 무척 건축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디자인이 워낙 특이했던 만큼, 디자인과 생산을 위해 최적화된 특별한 소프트웨어를 이용했고, 레이저커팅 등의 기술을 사용했다고 한다. 비욘세나 마돈나 등의 의상을 만들기도 한 베카 멕카렌은 건축 전공자답게 구조가 돋보이는 작업을 발표하고 있다.
GE의 엔지니어들도 베카 멕카렌이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있다. 다만 GE의 경우에는 결과물이 차세대 항공기 제트 엔진인 LEAP과 GE9X의 3D 프린팅 부품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런 사례를 보면 예술과 기술의 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것 같다.
뉴욕 패션계에서 최근 몇 년 간 가장 주목 받는 신인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조너선 심카이(Jonathan Simkhai)는 특유의 ‘시크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2015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그는 각이 진 패턴을 이용했는데, 깨진 유리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물질의 균열이나 변형을 연구하는 파괴역학(fracture mechanics)과의 연관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대목이다.
파괴역학은 첨단 소재의 강도 실험 같은 연구에서도 유용하게 쓰인다. 소재의 강도를 실험하기 위한 파괴 실험이라면 GE를 빼놓을 수 없다. GE글로벌 리서치에서는 세라믹매트릭스복합소재 같은 첨단 소재의 내구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2.26톤의 힘으로 유리병을 파괴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제트 엔진의 내부 부품으로 쓰이는 세라믹매트릭스복합재는 극도로 높은 압력을 견딜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이런 파괴 실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 대학원을 올해 졸업한 베이징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안드레아 지아페이 리(Andrea Jiapei Li)는 파격적인 디자인과 “나는 나다(I AM WHAT [I AM])”라는 독특한 브랜드로 화제가 되었다. 올해에 발표된 어떤 옷들에는 “나는 자신을 찾고자 한다(I try to find myself)”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특히 사진에 등장한 것과 같이 구조적으로 복잡한 꼬임을 가진 의상들은 자연스레 생명체의 단백질 구조를 연상시킨다.
과학자들은 단백질 구조의 발생 원리나 기능을 아직 계속 연구하고 있다(GE헬스케어의 전직 수석 과학자였던 제임스 로스먼(James Rothman)은 지난 해, 단백질과 세포생물학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론 물리학자들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물리학의 인력을 통합하는 단일한 이론을 찾으려 노력 중이다. 이런 이론으로 여러 꼬임이나 매듭, 시공간 등을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안드레아 지아페이 리는 인터뷰에서 아티스트 제임스 터렐과 건축 설계 등에 관심이 많다고 밝히기도 했다. 여성복을 주로 만드는 이 젊은 디자이너의 관심사가 기술과 예술 분야를 구분 없이 두루 넘나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디자인과 디자이너들이 보여주는 기술적인 관심과 앞서 살펴본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경우를 함께 비교해 본다면 어떨까? 패션 디자이너들의 기술에 대한 관심은 “패션에 종속된” 것일까, 아니면 “기술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것일까. 남과 달라지기 위해 기술의 표면적인 이미지를 담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기술의 근저에 놓인 기술적 상상력 자체를 이해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려 한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아마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어떤 디자인이 일시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 남을지 아니면 새로운 시대 정신을 담은 선구자가 될지는 시간밖에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기술이 살아남느냐가 시간 속에서 그리고 그 기술이 쓰이는 현장에서 결정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