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와 혁신을 주요한 화두로 삼아온 기업 GE는 얼마 전부터 ‘퓨처오브워크’라는 새로운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중에는, 왜 굳이 변화해야 하느냐고, 지금도 잘 되어가고 있는데 왜 낯선 미래를 향해 진화해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기계와 기계가 소통하는 사물인터넷 기술이나, 3D 프린팅 등의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제조 과정 등이 통합되어 ‘브릴리언트 팩토리’로 바뀔 것이라는 GE의 예측을 즐겁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변화와 진화를 주제로 하고 있는 어느 아티스트의 작업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 세계 속에 미래를 두려워하는 이들과 더불어 나누고 싶은 통찰력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허은경, Blobby, 2013 13 X 14 X 15(smallest) ~ 20 X 23 X 17(maximum)(cm) silicone, glass, mixed media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지구가 둥글다고 말하는 사람이 비정상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던 사람의 세계는 단조롭고 평화로웠을지 모른다. 자신이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이며, 그 지식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을 테니 말이다. 아티스트 허은경은, 모든 것이 변화하며 그 변화와 변형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이 세상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에 없는 형태로 가득하다.
허은경 작가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기형(畸形)’에 대한 관점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아프거나 다쳤을 때, 아니면 선천적인 이유로 몸에 변형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흔히 ‘기형’이라고 한다. 정상에서 벗어난 기괴한 형태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사물이나 생명체의 형태에 특정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것은 비정상이라는 가치 판단이 숨어 있다. 작가는 그런 세상의 잣대를 거부하며 이 새로운 형태는 ‘기형이 아니라 이형(異形)이다’라고 선언한다. 다르다고 해서 비정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이형’의 생명체 역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며, 이 세상을 살아갈 그 나름의 권리가 있다고 덧붙인다. 작가가 유독 정성을 쏟아가며 이형의 형태를 장식하고 꾸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Blobby> 시리즈는 허은경 작가가 이형의 생명체에 쏟는 사랑과 관심을 집약한 작업이다. 실리콘과 유리를 주재료로 한 ‘블러비’들은 사람의 신생아와 비슷한 3킬로그램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또한 사람이 시간 속에서 인생을 쌓아가듯, 이 블러비들 하나하나에도 개별적인 스토리와 역사를 부여했다.

이형의 생명체들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와 배경을 그림으로 설명한 드로잉 시리즈
허은경, (좌)pink blooby drawing, 2012, 21x21cm marker, ballpen, color pencil
(우) Dancing water , 2011, 72 X 80(cm), oriental ink, rice paper
작가의 그림에서는 변형하고 진화하는 것은 생명체만이 아니다. 가장 안정적인 형태라고 믿어온 사각형조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마치 생물의 세포 분열처럼 유기적이며 비현실적인 형태로 바뀐다.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완성된 형태는 섬세한 레이스 장식처럼 곱다.

허은경, Black square drawing 시리즈, 21 x 29,7cm, oriental ink, rice paper
이형의 생명체가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지닌다. 이런 진화가 이제 도형으로 이어진다. 생명과 비생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진화하고 변화한다. 아티스트 허은경이 바랐던 바는 어쩌면, 기존에 이 세상을 유지하던 딱딱하고 굳은 가치관마저 이러한 변형/진화와 더불어 유연하게 녹아버리는 것 그리하여 그 편협하던 사고방식이 어느 날 고운 꽃처럼 성장하고 진화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허은경, Micro,macro 시리즈, 2009, 24 X 24 X 6 (cm),
Korean traditional lacquer(urush), mother of pearl, wood box
작가의 <마이크로, 매크로(Micro, Macro)> 시리즈는 이런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된다. 작가 특유의 기법인 옻칠과 나전 공예 기술을 활용한 이 작업들에서는, 기하학적인 것 같으면서도 왠지 낯선 형태들을 만나게 된다. 작가 본인의 설명을 빌자면, 이 형태들은 (기형이 아닌) ‘이형’의 생명체들이 성장하기 위해 세포 분열을 하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생물계에서의 일반적인 세포 분열과는 다르게, 작품 속 세포들은 때로는 기하학적으로 분열하기도 하고 때로는 홀수나 비대칭형으로 분열하기도 한다.
세포의 관찰기라는 이 일련의 작품들은 한편으로 거대한 우주선이나 우주 기지, 천체처럼 보인다. 시리즈의 제목인 <마이크로, 매크로>처럼, 아주 작은 것인 줄 알고 들여다보았는데 그 안에 아주 큰 것이 있다. 아주 거대한 것인 줄 알고 들여다보았는데 지극히 작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세상이 그 안에 있다. 현미경으로 본 것인지, 아니면 고배율의 천체망원경으로 본 것인지 알 수 없는 형태들. 정상/비정상의 구분,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의 구분이 인위적인 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작가가, 마이크로 우주/매크로 우주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허은경, (좌)Space ship , 2011, 94 X 204 X 4 (cm), Korean traditional lacquer on board
(우) Guardian of insect , 2011, 94 X 204 X 4 (cm), mother of pearl, Korean traditional lacquer on wood board
변화와 변형은 기존의 경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에게 그 경계는 한없이 높고 딱딱한 담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높은 담장 안에서 누리고 있는 지금의 일상이 더없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계와 구분은 결국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닌가. 지금 ‘정상’이라고 믿는 것이 한때 ‘미친 생각’이나 ‘몽상’에 지나지 않았듯이, 당장에 낯선 상상력이라 보이는 생각들이 가까운 미래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경계를 넘어서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아티스트 허은경은 세상이 만든 낡은 구분을 따르지 않고, 기형으로 내쳐졌던 형태들을 끌어안음으로써 경계를 녹여 무화시켰다. 예술가다운 방식이다. GE는 별개의 것이라 믿었던 것들을 한데 결합하고 있다. 기계와 인터넷을 통합하고, 첨단 기술을 디자인과 인간을 향해 운용하며, 집단 지성의 힘을 빌어 창의력의 단계를 높인다. 통합의 상상력으로 경계를 넘는 방식이다.
당신에게 맞는 변화의 원리, 진화의 상상력은 어떤 것인가. 앞에 있는 담장이 높다고 불평만 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나만의 상상력과 통찰력을 발견하기 위해 나서야 할 때다.